아이덴티티 단편 제임스 맨골드
영화를 추천해 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영화 시작 전에 거짓말을 하나했다. 그것인 즉슨, 나는 영화를 추천받기 전에 스포일러를 밟았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주말 나는 인터넷에서 미국 서부의 한적한 국도에 자리잡은 외로운 모텔이 나오는 영화를 찾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이덴티티라는 영화를 추천하는 글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분위기는 추리 스릴러보단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범죄 로맨스 도주물이었으므로 아무런 별 감상없이 스크롤을 내렸다. 사실 이건 내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게 두 문단 내렸더니 블로그 주인이 다짜고짜 결말을 적어놨다. 그 문장은 다중의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뭐였냐면 '그렇다. 그들 열한명은 모두 이중인격자였던 것이다.' 대충 이런 문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사람이 11명인데 그 사람들 전부가 다 이중인격자라고? 미친 영화군... 하며 뒤로가기를 눌렀다. 그리고 십분 뒤에 그 영화를 보자는 추천을 받았다. 심지어 스포일러는 절대 찾아보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냥. 그래 알았어. 라고 답했다. 11명의 미친 사람이 나오는 영화라고 하니까 내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미쳤다는 리액션이 절로 나오리라 믿었다.
다행이도 처음부터 어느 해리성 인격장애를 가진 범인에 대한 취조 장면이 나왔다. 짜잔, 범인은 사실 11명의 이중인격자들이었습니다ㅡ. 라는 반전이 아니라서 나는 가슴을 반쯤 쓸어내렸다. 뭐야... 반전 결말도 아니네. 그리고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처럼 폭우가 내려 한적한 국도의 한 모텔에 어쩔수 없이 하룻밤 모이게 되는 열몇명의 얼굴 면면을 열심히 살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들 모두가 이중인격자라고? 그 사실에 매몰된 것과 별개로 영화는 언뜻언뜻 추리물 다운 힌트를 의도적으로 흘렸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추리를 했다. 얘 수상해. 얘도 수상해... 말콤은 사실 여자 아냐?(패리스를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수사 장면과 교차하며 맞물리며 오.. 내가 스포를 잘못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건(모텔) 과거 - 수사(현재) 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실제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란 점이 꽤나 재밌었다. 그리고 기억은 현재를 지배한다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마지막 인격을 배려해 죽어가면서 거짓말을 한다.<라는 선택지가 인격들 사이에 있는 것도 꽤나 재밌는 요소였다.
결말보다도 더 감명깊게 본 장면은 형사, 검사, 의사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주인공이 하나의 몸, 하나의 얼굴로 여러 인물의 대사를 번갈아가며 하는 장면이었다. 그 비극적인 장면은 몹시 그리스의 희극 극작가 같았으며 연민이 들게 하였다. 다중인격자를 다루는 매체는 워낙 24년엔 흔한 일이고, 영화 자체도 클래식한 추리물을 추구하고 있어서 매우 신선한 느낌의 영화는 아니었지만, 절대 엉성하게 만들지 않아 충실하고 완고한 느낌의 짜임새와 결말이 좋았다.
정체성은 비밀이다. 정체성은 불가사의하다. 정체성은 살인자다.